부부마저 갈라놓은 北 성분제도

2023-08-31     도명학 탈북작가·법무법인 법승 전문위원
도명학

필자가 1990년대 후반 북한 양강도 혜산시에서 직접 겪은 기막힌 사연 하나가 있다.

어느 날 평소 아버지처럼 존경하던 노인이 문득 찾아왔다. 집안에 큰 문제가 생겼으니 도와 달라는 거였다. 사연인즉 평양에 살고 있는 딸이 전투기 조종사인 남편과 이혼했다는 것이다. 노인의 장남 때문이었다.

국경경비대 군인으로 복무하던 아들은 근무 기간 중 알게 된 압록강 건너편 중국인으로부터 북한산 산삼을 사겠다는 주문을 받았다. 적지 않은 돈을 벌 기회였다. 그런데 양강도 지역 산삼은 매우 귀한 약재여서 많은 돈이 필요했다. 돈만 있으면 웃돈을 많이 벗겨 먹을 수 있건만 아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인에게 노동당원증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는데, 이것이 그만 화근이 되고 말았다.

아들은 산삼을 구입하려다 사기꾼에게 속아 돈을 모두 잃게 됐다. 중국인은 매일 압록강에 나와 돈이든 산삼이든 내놓지 않으면 당원증을 북한 보위부에 보내겠다고 위협했다. 이것이 군부대 보위원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아들은 수령이 준 정치적 생명을 돈과 바꾸려 한 ‘배신자’로 낙인 찍혀 체포됐고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다.

조종사 사위는 ‘배신자 처남’을 둔 것이 결격사유가 되어 비행기에서 내리게 됐다. 이혼하면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지만 이들 부부는 함부로 이혼할 처지가 아니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남자를 여자의 부모가 데려다 아들처럼 키워 사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아이까지 있었다. 고민 끝에 부부는 일단 가짜로 이혼, 남동생 문제를 해명하고 나서 재회하기로 했다.

여자는 평양을 떠나 친정에 돌아왔다. 하지만 이혼을 했는데도 남편은 여전히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이들이 부부이기 전에 친남매나 다름없는 사이라 혹시라도 아내와 갈라진 남자가 당국에 앙심을 품을까 우려한 조치였다. 부모도 가까운 혈육도 없는 사람이 전투기를 몰고 남쪽으로 기수를 돌리게 되면 큰 낭패였다. 결국 비행기를 다시 타려면 다른 여자와 결혼하라는 요구였다.

노인은 이 사연을 가지고 진정서를 써 중앙당에 보내기로 결심했는데, 문장을 잘 만들 수 없어 필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진정서 한 장이 체제의 속성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중에 남자가 중앙당 고위 간부의 딸과 재혼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부부의 의리마저 깨뜨리는 북한 성분 제도의 민낯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