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조선은 어찌할 터이냐?" 영적 메시지 들은 듯 '생생'

⑦ 조선에 큰 족적 남긴 선교사들 스크랜튼·아펜젤러·언더우드 모두 종교적 열정으로 조선행 자원 언더우드, 인도선교사 지원 준비 중 조선 최초 ‘선교목사’로 임명

2022-01-24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미국 선교사들이 어떻게 조선에 입국하게 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스크랜튼·아펜젤러·언더우드 등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이들이 돈이나 세속적 명예를 위해 조선 선교를 자원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열악한 생활환경을 넘어 생명의 위협이 예상되는 곳으로 왜 이들은 가려 했을까. 역시 종교적 열정과 박애정신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들 선교사가 세운 근대식 병원과 학교는 서구 근대 문명의 에센스를 전해주는 핵심 매개였다. 기독교 복음을 통해 가장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정치적인 그 무엇이 싹트기 시작한다. 스트랜튼 부인 매리 여사의 영어학교는 이 땅에서 처음 이뤄진 여성교육이었고, 장차 이화여자대학교가 된다. 언더우드의 연세대학교, 최초의 근대 병원 광혜원(→제중원)에서 발전한 세브란스 병원 등, 모두가 우리의 근현대사를 준비하고 지탱한 존재들이다.

스크랜튼과 아펜젤러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본 와일리 감독은 윌리엄 스크랜튼 박사를 의사로,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목사 자격으로 파견하기로 한다. 그러나 목사 파견자가 거절하자 헨리 아펜젤러가 추천된다. 아펜젤러는 뉴저지 주에 위치한 드루 신학교 졸업을 앞둔 채 일본 선교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와일리 감독이 푸저우에서 갑자기 사망한다. 조선 선교사들의 임명은 그 후임 감독인 찰스 파울러(1837.8.11~1908.3.20)가 하게 된다.

파울러는 아펜젤러를 파견하기를 원했다. 반면 가우처는 이미 2년전 자신의 집에서 개최한 한 행사에서 아펜젤러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반대한다. 그 이유는 아펜젤러보다 선교 경험이 더 있는 노련한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파울러와 가우처는 아펜젤러를 파견할 것에 합의하고 본인에게 통보한다.

아펜젤러 내외와 스크랜턴 내외, 그리고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1885년 2월 27일 요코하마를 통해 일본에 입국한다. 그리고 1885년 3월 5일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교정에 있는 매클레이 목사 서재에서 첫 공식 회의를 개최한다. 당시 회의록에 의하면 오후 2:45에 매클레이 박사를 의장으로 회의를 속개했다. 조선에 학교를 세우는 사업을 위해 배정된 기금 중에서 200달러를 토쿄의 미-일 전문학교 (아오야마카쿠인靑山學院대학) 재학 중인 4명의 조선인 학생들을 1885년 말까지 지원하기 위해서 따로 배정했다. 매클레이 박사가 감리교 교리문답 1번의 조선어 판을 출판하도록 허락한다. 또한 리주테이씨(이수정)가 번역한 <복음서 언해>도 출판할 것을 허가했다. 학교 설립기금 중 250달러가 책자와 찬송가 번역·출판에 배정된다.

이 회의록에 등장하는 이수정은 1882년 수신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통해 일본에서 선교 중이던 미국 장로교의 조지 녹스와 감리교의 로버트 매클레이 목사를 만나 개종한다. 그 후 이수정은 재일 조선인들 사이에 포교 활동을 벌이면서 성경의 조선어 번역 작업에 착수하고 미국의 선교 단체에 조선 선교를 시작할 것을 종용한다. 이수정 등의 활동으로 일본 내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의 중요성·시의성을 느끼며 이에 대한 채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헨리 아펜젤러.
아펜젤러와 그의 학생들.
윌리엄 스크랜튼.
메리 스크랜튼.
메리 스크랜튼이 설립한 이화학당(1891년 경 전경).

아펜젤러와 그의 부인은 1885년 부활절 제물포에 입항한다. 그러나 미국 공사관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하자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한양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일본으로 되돌아 갔다가 6월 다시 입국한다. 반면 스크랜튼 목사는 부인과 모친을 일본에 남겨둔 채 우선 혼자 4 월 28일 인천을 통해 조선에 도착한 후 5월 3일 한양으로 들어온다.

한양에 도착한 바로 이튿날 이미 고종의 윤허를 받아 불과 며칠 전 제중원을 운영하기 시작한 알렌 박사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제안 받는다. 스크랜튼 목사는 한 달 동안 알렌 박사를 도와 일하다, 감리교 독자적인 병원 설립이 결정된다. 그리고 정동 미국 공사관 바로 옆에 한옥을 사서 병원으로 개축, 1885년 9월 10일부터 환자들을 받기 시작한다. 6월 초, 스크랜턴은 자신의 가족과 아펜젤러를 부른다. 스크랜턴은 가우처 박사가 보낸 기금으로 덕수궁과 미국 공사관이 지척인 정동 높은 언덕에 약 4에이커(약 4900평)의 땅을 매입해 감리교 본부 관사들을 짓는다.

언더우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호러스가 6살 때 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호러스와 그의 형 프레드는 프랑스 불로뉴-슈르-메르의 기숙 학교에 보내진다. 호러스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1872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호러스 나이 12살 때 일이다.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한 언더우드는 뉴저지주의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입학했다. 1784년 네덜란드 개혁 교회가 설립한 뉴브런즈윅 신학교는 장 칼뱅의 신학과 체제를 철저하게 따르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 개신교 신학교다. 1884년 신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같은 해 뉴욕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1월 뉴브런스윅 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언더우드는 원래 인도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1882~1883년 겨울 신학대학에서 한 학생이 미국과 갓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에 대해 발표하는 것을 듣고 조선 선교사를 자원한다. 언더우드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금 토쿄 메이지 가쿠인(明治學阮)에 가 있는 알버트 울트만스(박사는 그때 학생 시절이었는데, 1882~1883년 겨울 뉴브런즈윅에서 선교지원자들을 모아놓고 최근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고 개국하기에 이른 은사(隱士)의 나라에 관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글 한편을 읽어주었다. 복음을 받지 못한 천 이삼백 만 명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 즉 문호 개방을 위해 교회가 기도하고 있던 이야기, 1882년 슈펠트 제독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문호가 개방됐으나 교회 측이 무관심해서 일년 여를 그냥 보냈다는 이야기 등, 연사는 고무돼 이 사업에 착수하고자 거기 갈 사람들을 찾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나로선 그때 인도에 소명이 있는 줄로 믿었기 때문에, 그리 갈 생각으로 몇 가지를 특별히 준비해 놓고 1년간 의학 공부를 했다. 조선에 가겠다는 사람이 쉬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나는 남에게 조선에 헌신할 선교사가 되라고 권해야지 하면서 이러저럭 1년을 보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교회도 손댈 눈치가 안 보이며, 교회를 대표해 외국선교 사업에 종사하는 지도자들까지 역시 조선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다. 바로 이때 내게 영적 메시지가 왔다. ‘너는 왜 못 가느냐?’ 그러나 인도의 요구, 이 땅에 대해 가지고 있다고 느끼던 나의 소명, 어느 정도의 준비, 이 모든 것들이 희미하게 떠올라 나의 갈 길을 막는 것만 같았다.

조선으로 가는 문이 다 닫혀 있는 것만 같았고, 처음엔 ‘어느 정도라도’ 연다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두 차례나 나는 모 교회에 간청했으나, 기금 부족으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 나는 장로교 본부에 두 차례나 호소했으나, 쓸데없는 일만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 조선으로 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본국에 머물러 있거나 원래대로 인도로 가는 문들만 열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머뭇거리다가 끝내 뉴욕의 한 교회의 인도 초빙을 수락하는 편지를 쓰고 말았다. 편지를 봉해 막 우체통에 집어넣으려던 찰나 ‘조선에 갈 사람 없느냐?’, ‘조선은 어찌할 터이냐?’ 하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편지를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조선행을 위해 다른 방면으로 노력할 작정을 하고, 센터스트리트 23번지(장로교본부 사무실)를 향해서 또 한 번 발길을 옮겼다. 때마침 안면이 있던 총무는 외출 중이었고, 초면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엘린우드 박사였다. 그는 자기도 조선 선교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며칠 후 그에게서 기별을 받았는데, 다음 본부 회의 때 내가 임명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장로교 선교본부는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조선 최초의 선교목사로 임명한다. 언더우드는 조선으로 떠나기 전 런던을 방문했다. 당시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될 경우 살아 돌아 올 확률이 높지 않았기에 고향을 방문해둔 것이다. 조선이 천주교를 잔혹하게 박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런던에서 만난 런던 선교회 임원들 중 한 사람은 언더우드가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더니 말했다. "조선, 조선이라... 보자, 우리가 아마 20여년전 한 사람을 파견했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했지요."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 순교한 토마스 목사 얘기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출발한다. 1월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장로교 선교사로 활약하고 있던 헵번 박사 밑에서 선교사업 훈련을 받는 한편, 조선인 신자 이수정에게 조선말을 배운다.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언더우드는 사흘 후부터 광혜원에서 알렌을 도와 일하기 시작했다.

연세대학교 설립자 호러스 언더우드.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
드루 신학대학(오늘날의 Drew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