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거사 당일 개화파의 칼 맞은 민영익을 살린 알렌

④ 개신교와 조선의 본격 만남

2022-01-02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의사·선교사 알렌은 19세기말 격동의 조선 역사에 본격 진입한 최초의 외국인이다. 1884년 10월 말 선교의 뜻을 픔고 한양에 안착한 지 약 40일 만에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거사 당일, 중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이 칼을 맞아 중태에 빠졌을 때 알렌은 기적 같이 환자의 생명을 구해낸다. 고종 내외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되는 계기였다. 서유럽 종교개혁 과정에서 등장한 칼뱅주의 개신교가 조선과 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를 강요하는 권력의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간 퓨리턴(청교도)들이 미국에 인류 최초의 근대적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웠고, 알렌은 그런 미국이 낳은 선교사의 한 사람이었다. 산업혁명 전후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달에 힘입은 의술로, 알렌은 조선의 개신교 역사 첫 장을 열게 된다. 그것은 신앙이기 이전에 선진 문명의 얼굴이자 신뢰할 만한 인간형의 발견이었다.

갑신정변과 알렌

1884년 12월 4일 한양의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호러스 알렌은 왕진을 갔다가 밤 9시경 귀가 한다. 집에 도착한 그는 부인 패니에게 이번 달이 기울기 전에 한양의 아름다운 달밤을 같이 산책하자고 한다. 알렌 내외는 10시 30분경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자리에 눕기 무섭게 사람들의 고함소리,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 자신을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렌이 응접실로 나가자 푸트 공사의 개인 비서 차알스 스커더가 기다리고 있다가 묄렌도르프가 보낸 쪽지를 건넨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 급히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알렌이 영문을 묻자 스커더는 조선 주재 외교사절들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교부) 주최 만찬에 참석 중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리에 조선의 실권자이며 중전의 조카인 민영익이 사태를 파악하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괴한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고 설명한다. 알렌은 곧바로 50명의 무장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향했다. 다음은 1884년 12월 4일자 알렌의 일기다.

묄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환자 상태는 최악이었고 사방에 피가 낭자했다. 현장에 이미 와 있던 14명의 조선 한의사들은 환자를 살리려는 나의 모든 시도에 계속 격렬하게 반대했다. 민영익은 오른쪽 귀 측두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나있었고, 목 옆쪽 경정맥도 세로로 상처가 나 있었지만 경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등 뒤로 나있었는데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 표피를 자르며 깊은 상처가 나있었다. 예리한 칼자국이 난 부위는 구부러져 있었다. 나는 피가 흐르는 측두골 동맥을 관자놀이로 이어 명주실로 봉합했고, 귀 뒤 연골과 목 부분, 척추도 모두 봉합했다… 팔꿈치에서 팔뚝까지 난 약 8인치의 깊은 상처도 명주실로 네 바늘 꿰매었다… 그의 왼쪽 팔에는 손목 바로 윗부분에 한 군데, 팔뚝 부분에 한 군데 등 두 곳에 상처가 나 있었다… 오른쪽 귀 뒤에 난 자그만 상처는 상처 길이가 표피 약 1인치 반이나 됐다. 넓적다리와 오른쪽 무릎 역시 길이 약 6인치의 긴 상처가 나 있었는데 이것도 모두 봉합했다 … 그의 정수리에는 계란 크기만한 큰 혹이 나있었다. 이 부위의 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상투를 튼 머리카락에 매달아 놓았다. 혹은 머리 중앙 부위까지 뻗어 있었는데 이는 둔중하고 예리한 무기에 얻어 맞은 듯했다. 만약 그가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민영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알렌과 부인 패니. 왼쪽은 미국 공사 비서 스커더.
폴 묄렌도르프.
갑신정변의 주역.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국동 우정국: 민영익이 개화파의 칼을 맞은 갑신정변 거사 장소. /한국학중앙연구원
거사 당일 우정국 낙성식 좌석 배치도.

알렌은 새벽 2~3시 자신의 가족을 살피러 자택을 다녀온 것 외엔 밤새 민영익의 곁을 지킨다. 그가 잠시 자기 집에 들렸을 때 고종으로부터 미국 공사관의 모든 외국인들과 함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궁으로 들어와 있으라는 전갈이 온다. 고종은 1881년 임오군란 때처럼 군중 봉기와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으나, 알렌은 가족과 상의 끝에 집에 남기로 한다.

알렌이 일본 공사관에 군인들을 보내서 자신의 집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자 일본 공사는 일본 군인들을 보내준다. 알렌은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부인과 아들에게 미국 공사관으로 가도록 한다. 푸트 공사 집에는 영국 총영사 애스턴 부부도 당도해 있었다. 알렌은 부인과 아들을 푸트 공사 공관에 남겨두고 민영익을 치료하러 다시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향한다. 5일(금요일) 저녁, 알렌은 또 한번 묄렌도르프의 집을 방문해 민영익을 치료한다. 이튿날 6일 오전 다시 왕진을 다녀온다.

6일 밤 알렌은 중국인·일본인 하인들과 함께 윈체스터 장총으로 무장하고 집을 지킨다. 그날 밤도 한양 시내에선 전투가 벌어졌지만 알렌의 집은 무사했다. 그 사이 민영익을 치료하러 오라는 전갈이 두 번이나 왔으나 안전을 염려한 푸트 공사가 알렌을 막아선다. 다음 날 아침 고종으로부터 민영익을 궁으로 옮기라는 전갈이 오자, 그렇게 한 후 알렌은 귀가했다.

7일(일요일) 오후 네 시경 일본 공사관 쪽에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총소리는 점차 알렌 집으로 다가오다가 서대문 쪽으로 멀어진다. 일본 외교관과 군인들이 한양을 빠져나가면서 조선군·청군과 전투를 벌이는 소리였다. 곧이어 일본 공사관이 불길에 휩싸이는 게 보였다. 알렌은 일본인 하인들과 자신의 집을 지키러 와 준 일본 군인 4명을 숨긴다.

그날 밤 민영익이 고종과 함께 청군의 진중에 있으니 즉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시내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곳곳에 모여 모닥불을 피우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알렌은 청군의 진중으로 향하는 길에 여러 번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한다. 청군의 진중에 도착하자 청의 정여창(丁汝昌) 제독과 민영익이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다음 날 아침 민영익을 또 한번 치료한 알렌은 청군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9일 아침, 알렌 집에 숨어 있던 일본인들은 미 공사관의 해군 소위 존 버나도우(1858~1908)와 중국인·조선인 군인들의 호위를 받고 제물포로 향한다. 알렌은 영국 해병과 함께 온 영국인 외과 의사 휠러와 함께 민영익을 보러 궁으로 갔다. 민영익을 진찰한 휠러는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알렌은 오후 3시쯤 집으로 돌아온다. 푸트 공사 내외, 애스턴 공사 가족 등 모두 다음 날 아침 제물포로 피신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러나 알렌은 부인과 상의 끝에 한양에 남기로 한다. "첫째, 우리는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우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때 여기를 떠날 수 없다. 둘째, 먹을 것이 넉넉해 오히려 편했다. 만일 제물포로 간다면 숙박할 곳도 마땅치 않고 식량도 넉넉치 않을 게 자명했다. 게다가 어린 아기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다. 우리는 남아서 우리의 임무를 다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호러스 알렌

미국 장로교 선교사 겸 의사였던 알렌이 조선에 정착한 것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불과 한 달여 전. 선교가 금지돼 있었다.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무급 의사로 신분을 숨긴 채 전교의 기회를 엿본다. 서양 의사의 도착을 당시 한양 주재 서양 외교관들 모두가 반겼다. 민영익이 부상을 당하자 묄렌도르프가 곧바로 알렌을 부를 수 있었던 이유다.

1858년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알렌은 1881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을, 1883년 씬시내티시 소재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프랜시스 패니 메쎈저와 결혼한 알렌은 선교사로 자원해 곧 중국으로 파견된다.

알렌이 졸업한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알렌이 졸업한 오하이오 마이애미 대학교.

1883년 8월 20일 델라웨어를 떠난 알렌 부부는 9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출항, 요코하마와 상하이를 거쳐 10월 15일 임지인 난징에 닿았다. 그러나 알렌은 중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1년도 안 돼 중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당시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과 의사들은 알렌에게 1882년 미국과 갓 수교한 조선에 가 볼 것을 권했다. 알렌은 1884년 6월 뉴욕의 장로교 해외선교 위원회에 조선으로 임지를 옮길 수 있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7월 허락의 답신을 받는다.

알렌은 부인과 갓 태어난 아들을 상하이에 두고 1884년 9월 14일 ‘난징호’로 상하이를 떠나 요코하마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당시 청-조선 간 정기 여객선조차 없었다. 9월 20일 제물포에 당도한 알렌은 9월 22일 오전 8시 나귀를 타고 출발해 오후 4시경 한강 나룻터를 거쳐 5시 남대문에 도착한다. 한양에서의 첫 밤을 여인숙에서 지낸 알렌은 이튿날 푸트 미국 공사를 예방했다. 푸트는 알렌을 반겼고 미국 공사관의 무급 의사로 임명한다. 같은 날 알렌은 묄렌도르프도 예방, 차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한양 집을 계약하고 상하이로부터 부친 짐을 제물포에서 찾은 알렌은 집수리와 정리를 중국인 청지기에게 맞긴 채 10월 11일 다시 중국으로 향한다. 나가사키를 거쳐 17일 상하이에 도착한 알렌은 부인과 아기, 중국인 유모와 함께 조선으로 출항했다. 나가사키에 들러 일본인 요리사를 월 10달러로 고용한 알렌과 가족은 26일 제물포에 도착, 10월 27일 한양에 입성한다. 갑신정변이 발발하기 38일 전이었다.(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III, 제 1장 신의 한 수’ 중에서)

초대 주 조선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